유래/전설 행정구역별 연혁 및 명칭 유래 정보제공
행정구역 연혁 및 명칭 유래
선압사지
(仙鴨寺址)
전북 임실군 청웅면 두복(斗福)리 산59번지 사동(寺洞)마을
고려 때 창건되어 조선 후기까지 있었다는 선압사는 僧舍 8간, 僧房 8간이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1800년대초 정읍에 살던 安東 權氏는 이 절터가 명당임을 탐내어 주지와 결탁하여 빈대를 잡는다는 핑계로 건물에 불을 지른 뒤 묘를 썼다고 전한다. 이곳을 春耕하면 빈대가 나왔고 깨진 기왓장도 많이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東國輿地勝覽 임실현 불우조에『仙鴨寺는 靈鷲山(白蓮山)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임실읍지 불우조에 선압사에 관한『在白蓮山東 僧舍八房 載勝覽今無』라는 기록이 있다.
해월신사
동학교리
설법장소
전북 임실군 청웅면 옥석(玉石)리 1137번지
임실군에 東學이 처음 포교된 것은 1873년 3월이다. 동학의 2세 교주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이 장수교인 김신종을 데리고 주치리 새목티 허선의 집에서 35일간의 설법을 시작하신 것이 처음이며 강진면에서 15일간 설법을 하였다.
해월신사
은둔지
전북 임실군 청웅면 옥석(玉石)리 1137번지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1894년 9월 동학 농민혁명 재봉기 이후 우금치 전투 등 격전이 벌어지는 시기의 대부분을 여기서 머물며 상황을 주시 하였던 곳이다. 11월 25일 김제 원평에서 전봉준과 함께 손병희 동학군이 후퇴하여 갈담을 거쳐 찾아온 손병희(3세 교주)를 만나 12월초 충청지역으로 도피하였다.
구고향교
(九臯鄕校)
전북 임실군 청웅면 향교(鄕校)리 273번지
청웅면은 삼한시대 마한의 54개 부족국가 중 대석색국의 구고현으로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와 조선조 태종 이전까지 구고현(고려 공민왕 때 구고군)의 소재지로서 현의 중심지가 되어 왔으나 조선조에 현청을 임실로 옮겼다. 임실로 옮기기 전에 향교가 있어 구고향교라 했었는데 현청 소재지를 따라 1413년(조선 태종) 건물을 헐어 임실로 옮겼다. 향교에서는 사학과 같은 지금의 중등교육을 시켰다. 숙종 원년 (1675년)에 간행된 운수지 고적조에 구고향교와 사마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개남
장군의 서당
전북 임실군 청웅면 향교(鄕校)리 605번지 성전(聖田)마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정부군과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김개남 (1853-1895) 장군의 외가와 처가가 이 곳 성밭이고 1871년부터 젊은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훈장을 했다는 고택 터. 김개남의 고향은 정읍이며 본관은 道康이다.
임실군제
2천도교구
전북 임실군 청웅면 향교(鄕校)리 605번지 성전(聖田)마을
1906년(布德 47년) 이 곳에 임실군 천도교 제2교구를 설치하였으며 (제1교구 운암면 지천리 교구장 최승우), 교구장에는 청웅면 옥석리 출신으로 1919년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이신 박준승 선생이 역임하였다. 1908년 청웅면 양지리에 통합 임실군 천도교구를 설치하면서 폐지되었다.
임실군천
도교구
전북 임실군 청웅면 구고(九皐)리 647번지
1908년(布德 49년) 3월에 임실군 운암면 지천리의 임실군천도교제1교구 (교구장 최승우)와 청웅면 향교리 성전마을의 제2교구(교구장 박준승)를 합하여 청웅면 양지마을 삼화학교(사마제학교) 주변 이곳에 통합 임실군 천도교구를 설치하였다. 1대 교구장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이며 삼화 학교 건립자금 제공자인 최승우이며, 2대 교구장은 동학농민혁명 참여 및 독립운동가이자 삼화학교장인 김영원, 3대 교구장은 허성, 4대 교구장은 김영원이 역임하였다. 삼한시대부터 현의 소재지였던 구고리에서 임실면으로 현청을 이전하면서 천도교구 역시 1916년 4월에 임실면 성가리로 이전하였다.
삼 화 학 교
(사마제학교)
전북 임실군 청웅면 구고(九皐)리 649번지
운암면 지천리 최승우와 시목동 김영원 등이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였다가 패하자 회문산에서 6년간 피신하였다가 전주에는 창동학교, 이 곳에는 1906년 삼화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가르쳤다. 자금은 최승우가 제공하고 김영원이 초대 교장을 맡았다. 학교 건립 추진위원으로는 박준승, 최승우, 박성근, 김영원, 황희영, 한영태 등으로 이들의 면면을 주시하고 또한 우수한 학생들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 하던 왜경은 이 곳을 배일사상의 온상으로 간주하고 1909년에 강제로 폐쇄 하였다. 그 뒤 이 곳을 천도교 347 교리 강습소로 개칭하여 활용하였으며 청웅면사무소로 이용되기도 했었다.
3·1독립운동
집결지
전북 임실군 청웅면 구고(九皐)리 494-1번지
청웅면민들이 질서정연하게 1919년 3월 11일과 15일에 만세를 부른 그 늠름함에 일본 헌병들이 놀래어 그저 지켜만 보았던 구고리 평지마을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던 곳으로 이 곳에 본부를 정하고 독립선언경축식을 거행한 뒤 각 마을을 돌며 질서정연하게 만세를 불러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16일과 17일에도 계속되었다. 독립운동 주동자로 옥살이를 한 청웅면의 11분들 영혼과 면민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깃든 곳이다. 박준창(남산리), 이강세(구고리), 박용식(구고리), 한도수(구고리), 한기수(구고리), 박성근(구고리), 정필조(구고리), 양성도(청웅), 이성의(구고리), 최종수(구고리), 이기섭(구고리)
구고리 앞산
성재
전북 임실군 청웅면 석두(石頭)리 607번지
백제 돌평현 때 조그마한 성이 있어 현령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1950년 6·25사변 당시 청웅·강진·덕치면의 면장과 지서장들이 합동 으로 근무하면서 빨치산으로부터 끝까지 자유를 수호한 보루이기도 하다. 덕치면 회문산에 주둔한 빨치산들이 3개면을 현물 수납과 해방지구로 만들기 위하여 여섯 차례의 끈질긴 습격에 완강히 대처하여 자유를 지켜낸 곳이다. 전북대학교에서 조사한 결과 깨진 기왓장과 벽돌이 다수 나왔으며 성을 쌓을 때 썼던 돌들은 아래로 옮겨져 논·밭두렁을 쌓는데 이용되었다. 산의 북쪽 하천변 옥전리 만호들 하단에는 6·25당시 군인들에게 보급품을 나르기 위해 소형 비행장이 있었다.
남산광산 전북 임실군 청웅면 남산(南山)리 산89-1번지
1951년 3월 14일 남산광산 굴속에 많은 공산유격대와 협력 주민들이 있다는 정보를 받고 국군 제11사단 13연대 2대대 병력과 임실경찰서 전투경찰, 반공청년단체인 향토방위대 등이 32개의 굴 입구 중 28개를 폐쇄하고 4개의 굴 입구에 고춧대와 생솔가지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 연기를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오소리 작전으로 많은 인명을 살상한 곳이다. 3일간 계속된 작전으로 굴 안의 많은 빨치산과 양민이 질식사 및 살상되었다고도 한다. 국립임실호국원에서 경내에 지하(토굴)로 200여m를 구축하여 일부 출입이 가능하다.
고인돌군 전북 임실군 청웅면 구고(九皐)리 산33-2번지
구고는 삼한시대 마한의 대석색국 중 하나의 부족국가 소재지로서 일찍이 문화가 발전한 지역으로 그 후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와 조선조에서도 구고현의 소재지로서 토속문명과 불교의 영향, 유교숭상의 영향 등 시대에 따른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매장의 문화도 다양했을 것으로 추정된 가운데 어느 때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지마을 북쪽 산자락 밭에서 묻혀있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며 지각변동 등으로 인해 더 많은 고인돌이 토사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 되어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개발과 연구 보존이 요구된다.
원동마을 전북 임실군 청웅면 구고(九皐)리
삼한시대 마한의 54개 부족국가 대석색국의 구고현으로 지금의 임실읍이 구고현에 예속되었고, 삼국시대 백제의 돌평현, 통일신라시대에는 구고현으로 순창군에 속했고, 고려초에 남원부에서 임실현에 합속되었다가 이 곳 출신 임몽고불화가 몽고에 귀화하여 고려에 원병을 요청하려 사신으로 와서 고려에 유익한 외교를 하였다고 해서 공민왕 3년에 구고군으로 승격하여 갑무를 두고 행정을 펼쳤는데 이때 현청(장소 미상)을 이 마을에 두고 현령이 거주하며 행정을 펼친 곳으로 조선조 태종 때 다시 구고현으로 격하된 곳으로 원이 살았다는 전설에 따라 원동이라 전하여 오고 있다.
옥밖거리 마을 전북 임실군 청웅면 구고(九皐)리
일찍이 부족국가가 발달하여 삼한시대 마한의 54개 부족국가 중 대석 색국의 구고현으로 임실의 서남과 서북을 관장했던 소재지로서 현청이 원동에 있어 현령이 거주하며 행정을 펼친 곳으로 백제의 돌평현 때 현령이 거주했다는 구고리 앞산 성재와 지금의 청웅파출소 사이에 죄인들을 가두고 교화시키는 監獄(위치 미상)이 있어 지금의 파출소 부근이 감옥의 담장 정문 부근이었다는데 이 마을이 감옥 밖의 마을이라 해서 그 전설을 따라 옥밖거리라고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병장
전석기의 묘
전북 임실군 청웅면 남산(南山)리 산29번지
전석기 의병장은 1861년 10월 7일 청웅면 석두리에서 부친 전규택과 모친 옥천 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선비정신을 훈도 받아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이었다. 48세의 고령에도 전주·금구·태인·임실 등지에서 항일투쟁의병대를 지휘하였으며 의용군수품 조달에도 힘썼다. 1909년 왜경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판결 받았으나 남의 나라 국권을 침탈하는 왜놈들에 대한 창의의 정당성을 일갈하면서 항고 하여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어 형기를 마치고 의병투쟁의 좌절을 한탄 하면서 신음하다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1990년 8월 15일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서훈되었다.
쌍효각비
(雙孝閣碑)
전북 임실군 청웅면 구고(九皐)리 214번지
박번(인덕정, 함양박씨) 1448년 진사시험 합격. 친환의 시탕 중 물오리를 원해 구고천에 나가 울며 구하기를 비니 물오리가 떠내려 와 이를 잡아 봉친 구병. 후손이 이 하천을 효례천이라 명명하였다. 박훈(수심제, 인덕정 종제) 1504년 진사시험 합격. 천성의 효심이 지극 하여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모친의 상 때 어려서 못했다 하여 나이 70세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유림의 추천으로 1512년 정려의 은전을 받아 쌍효각을 건립하였다. 두 분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구고천과 향교천이 합수한 곳 효례천 바로 위에 압구정을 건립하였다.
구고팔경
(九皐八景)
斗滿明月 : 청계리 동쪽 두만산에서 솟는 명월의 풍경은 언제보아도 매우 아름답다.
白夷淸風 : 백이산의 맑은 바람은 무더운 여름철에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해 준다.
龍湫水聲 : 사동 물줄기가 용소에 합쳐 한 토막 폭포가 되어 은은한 물소리를 냈다.
伊尹歸雲 : 이윤고개의 뭉게구름이 아름답고 소나기나 폭설을 수반하기도 한다.
鉢山暮煙 : 땅거미가 질 때 발산마을 상공에 띠처럼 깔린 연기가 가관이었다.
孝禮漁火 : 기러기를 잡아 봉친했던 효례천에는 밤에 하동들의 횃불이 가관이었다.
鷹峰孤松 : 매봉 석산 봉우리의 한 그루 소나무는 낙락장송의 이채를 띄운다.
白蓮落照 : 백련산 너머로 지는 해는 가을단풍과 함께 붉은 빛을 더한다.
학정서원
(鶴亭書院)
전북 임실군 청웅면 구고(九皐)리 573번지
본 서원은 1600년(선조 33년)에 구고리 남쪽 迓鷗亭에 창건했다가 1621년 (광해 13년) 酒泉洞으로 옮겨 모셨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다. 1656년(효종 7년) 鳴鶴亭으로 옮겼는데 賜額書院과 같은 하교가 있었다.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영령들이 오르내리실 곳이 없어 부득이 단을 쌓고 1년에 겨우 한 차례씩 제를 올렸다. 1994년 이 고을 사람들과 영령의 후손들이 성금을 갹출하고 임실군의 지원으로 서원을 복원하고 매년 3월 3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본 서원은 건재 김천일을 주벽으로 인덕정 박번, 수심재 박훈, 경재 홍붕, 운암 이흥발, 운학 조평, 취정 김원근을 배향하고 있다.
석두광산 전북 임실군 청웅면 석두(石頭)리 산22번지
일제시대에 상당한 규모로 채광된 바 있으나 지금은 휴광상태로 있다. 광산은 소재지에서 2km정도 떨어져 있으나 일본인들이 금을 생산하기 위해 채금공장을 세워 오랫동안 가동하였고 그 공장까지 진입도로가 지방도였었다. 본 광산은 광화대의 양상으로 금은을 수반한 함유물 석영세막이 주로 발달함으로써 고품위대를 이루고 있으나 세맥은 연장성이 불량하고 방향이 일정치 않아 탐광에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갱도 안에서 실꾸리를 넣으면 구산굴과 석두들 가운데 산자락에 우물이 있었는데 그 곳까지 닿는다는 전설이 있으며, 한 때는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기도 하였다.
박준승
선생 생가
전북 임실군 청웅면 옥석(玉石)리 506번지 주치(舟峙)마을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이신 박준승(자암, 1866-1925) 선생은 이곳에서 박호진과 변씨의 삼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17세 되던 해에 남산리로 이사했다. 일찍이 운암면 선거리 시목동 독립 운동가인 김영원 선생에게서 교육을 받고 1890년에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에 참여하고 무인운동을 전개하였고 천도교 교구장과 대교구장을 역임하며 교세확장에 몸바쳐오다가 천도교 도사로서 손병희 선생의 권유로 3·1운동에 가담하여 2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독립운동과 천도교 발전에 일생을 바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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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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