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군 제59회 임실 군민의 날 임실군 성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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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전설 행정구역별 연혁 및 명칭 유래 정보제공
행정구역 연혁 및 명칭 유래
성수면
(聖壽面)
연 혁
  • 삼국시대 : 백제의 운수현에 속함
  • 고려시대 : 남원부에 속함
  • 조선시대 : 상동면, 하동면 2개면, 11개리로 구분
  • 1914년 : 상동면, 하동면을 성수면으로 통합
  • 1972년 : 11개 법정리, 21개 행정리로 구성됨

명칭유래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성수산 상이암에서 100일 기도를 드리던 중 성수만세(聖壽萬歲)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어 성수면으로 불리고 있다.
당당마을
(堂堂里)
당당마을은 1406년 조선 시대 초엽 홍민규라는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홍씨는 비파를 잘 연주했다고 전해지는 데 연주마다 비파 음이 산허리에서 메아리쳐 댕댕하고 소리가 났다고 한다 기이하게 여긴 홍씨는 산울림이 나는 곳을 찾아가 보자 햇볕이 잘 들고 지세도 아름다워 당당이라는 지명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속해 있는 마을은 당당, 비슬이 있다.
후촌마을
(后村里)
후촌마을은 1450년 전 설씨가 정착하여 살게 되었으며 연이어 송씨, 양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면 소재지 뒤에 있다 하여 뒷마을, 후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효자, 효부가 많이 배출되어 임금님으로부터 상을 받은 일이 많았다고 하며 임금님의 성은을 길이 남기기 위하여 뒤 후(後)를 임금 후(后)자로 고쳐 부르기로 하였다. 속해 있는 마을은 후촌, 양지촌, 신흥촌이 있다.
중촌마을
(中村里)
중촌마을은 400여 년 전 조선 시대 말부터 심씨와 김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1850년경에는 상동마을이라 하였으나 이후 1972년 행정 구역 개편을 진행하며 중촌마을로 정해지게 되었다. 속해 있는 마을은 중촌, 행촌, 석현이 있다.
학당마을
(學堂里)
학당마을은 1970년경 풍산 심씨와 남원 양씨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1986년경에는 상동이라고 불리었다. 마을에 서당을 세워 젊은이를 교육했고 인재를 배출하여 배움터라는 뜻으로 학당이라 했다고 한다. 1925년 면사무소 및 초등학교가 들어섬으로 교육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속해 있는 마을은 학당, 부동, 동청, 곡촌이 있다.
삼봉마을
(三峰里)
삼봉마을은 약 300년 전 조선 시대 중엽부터 형성된 마을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앞산이 세 봉우리로 되어 있어 세 봉우리의 마을, 삼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8의사와 함께 구한말 항일의병운동을 이끌었던 이석용 의병장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1972행정구역 개편. 속해 있는 마을은 죽전, 신덕, 원삼봉이 있다.
금동마을
(金洞里)
금동마을은 1450년경 전주 유씨, 청주 한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마을 분포가 길고 가느다라 해서 세동이라 부르다가 광복 후 마을 주민의 의사에 따라 금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1972년 행정 구역 개편을 진행하며 금동마을로 정해지게 되었다. 마을은 위치에 따라 상금동과 하금동으로 나뉜다.
양암마을
(陽岩里)
양암마을은 1550년경 진주 소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을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마을 앞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어 해가 뜨면 제일 먼저 이 바위에 햇빛이 비친다고 하여 볕이 비치는 바위, 양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속해 있는 마을로 매바위(응암)와 도화동이 있다.
대왕마을
(大王里)
대왕마을은 고려 중반기에 전주 최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성수산 상이암에서 100일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이 마을을 지나던 중 마을의 집들이 상서로운 구름에 싸여 있는 모습을 보고 대운이라 하였다 한다. 1972년 행정 구역 개편을 진행하면서 대운을 대왕으로 개명하며 대왕마을로 정해지게 되었다. 속해 있는 마을로 대왕, 주암이 있다.
성수마을
(聖壽里)
성수마을은 1470년경 조선 시대 김씨들이 화전을 일구고 살았는데 안동 권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알려진다. 성수라는 명칭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성수산 상이암으로 100일 기도를 드리며 성수만세(聖壽萬歲)라는 계시를 받아 성수로 마을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속해 있는 마을은 수철, 지암, 갈골이 있다.
왕방마을
(枉訪理)
왕방마을은 1470년경 조선 시대 화전민이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성수산 상이암으로 100일 기도를 드리러 가는 도중 안개를 만나 헤매며 이 마을에 들려 쉬어갔다고 하여 굽어 찾은 마을, 왕방이라 하게 되었다. 속해 있는 마을은 왕방, 원증, 대판이 있다.
조치마을
(朝峙里)
조치마을은 조선 시대 화전민이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치라는 명칭은 마을 남쪽에 지사면으로 넘어가는 재가 위치하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가 성수산에서 100일 기도를 하러 가며 아침에 이 재를 넘어 마을에 도착했다 하여 아침재라 마을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한다. 1972년 행정 구역 개편을 진행하면서 아침재의 한자명인 조치마을로 정해지게 되었다.
효촌마을
(哮村里)
효촌마을은 300여 년 전 장수 황씨, 남원 윤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 시대 중엽 윤두표란 자가 효성이 지극하여 전라감사 김만길의 상주로 숙종대왕의 정려의 은전을 받아 효자문을 세운 후 효의 마을, 효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28의사와 이석용 의병장을 소충사에 모시고 기리며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평지마을
(平地里)
평지마을은 조선 시대 중엽 강화 노씨들이 정착하였으며 앞뜰이 넓고 평탄하여 지대가 평평한 마을, 평지라 부르게 되었으며 농토가 비옥하여 부촌으로 알려져 있다. 속해 있는 마을은 평지, 담안이 있다.
천동마을
(泉洞里)
천동마을은 조선 시대 중엽 어떤 스님이 마을 앞 귀목나무 아래서 쉬면서 마을 아래 삼청호의 물이 맑고 깨끗하다 하여 샘의 마을, 천동이라 칭하였다 한다. 조선 시대 1875년(정조9년)효정의 은전을 받기도 한 효자이고 문장가인 수암 최식의 출생지이며 현재는 안 마을인 내천동, 바깥 마을인 외천동을 합하여 천동이라 부르고 있다.
구곡마을
(九谷里)
구곡마을은 1630년 조선 시대 중엽 여산 송씨, 전주 이씨, 동래 정씨들이 이곳에 정착해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곳은 영·호남의 거상과 상인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의 큰 목으로 이 마을에는 본래 10개의 골짜기가 있어 열골이라 하였는데 지사면의 힘센 사람에게 한 골짜기를 빌려주는 바람에 아홉골이라 하였다 한다. 1972년 행정 구역 개편을 진행하며 아홉골의 한자명인 구곡마을로 정해지게 되었다.
신촌마을
(新村里)
신촌마을은 조선 시대 영·호남의 거상과 상인들이 육로를 이용할 때 이곳에서 쉬어가는 일이 잦아져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서북쪽 삽치고개의 계곡에 넓은 바위가 많다 하여 너른바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조선 시대 말 큰불이 나서 마을이 전소된 후 새로이 집을 짓고 살게 되어 새로이 형성한 마을, 신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월평마을
(月坪里)
월평마을은 삼국시대에 형성된 마을로 추정되며 지형이 반달형이고 들이 넓다 하여 반원 모양의 평평한 마을, 월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형이 험준해 삼국시대에 형성된 산성이 마을 내 있으며 산성 아랫마을이라 하여 성저라 부르기도 한다. 1972년 행정 구역 개편을 진행하며 월평마을로 정해지게 되었다. 속해 있는 마을은 월굴, 수월, 성저가 있다.
계월마을
(桂月里)
계월마을은 조선 시대에 여산 송씨와 전주 최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처음에는 제월이라 하였으나 그후 지세가 둥근 달과 같고 마을 형세가 계수나무와 같다 하여 둥근 달과 계수나무를 닮은 마을, 계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 후부터 자손들이 명랑하다고 전한다. 속해 있는 마을은 신계월, 구계월이 있다.
덕치마을
(德峙里)
덕치마을은 조선 시대 중엽 경주 김씨와 진주 강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뒷산이 매우 높은 마을이다. 지사면으로 넘어가는 육로가 마을 앞을 지나 뒷산을 넘어가야 했다고 전해져 큰 산이 있는 마을, 덕재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1972년 행정 구역 개편을 통하여 재의 한자어인 치(峙)를 사용하며 덕치마을로 정해지게 되었다.
오류마을
(五柳里)
오류마을은 1570년경 조선 시대 선조 때 경상남도 함양으로부터 진주 강씨가 이주하고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뒷산의 산세가 버드나무 다섯 가지의 모양, 오령류지(五領柳枝)형으로 되어 있다 하여 오령류지의 마을, 오류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판마을
(大阪里)
오류마을은 대판마을은 조선 시대 말 창녕 성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마을 동쪽 골짜기의 이름이 대판골이라 하여 그 옆에 있는 마을이라 마을 이름을 대판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현재는 현대 영농의 선구적 역할을 다해 과수 단지 등이 조성되어 부촌으로 탈바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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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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