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군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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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실군'이라는 군명칭의 연원

임실은 언제부터 임실이었을까? 이런 의문은 비단 요즘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옛 사람들의 기록에서도 반드시 지명을 이야기하면서 과거에는 여기에 무엇이 있었고, 어떤 특징적인 이야기가 있으면 반드시 소개시켜서 사람이 살아 온 연원을 밝혀 의혹없이 모든 사람들이 잘 살기를 바랬던 것 같다. 임실에서 발견되는 구석기 유적이나 청동기시대 유적은 임실에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것은 역시 '임실'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시기이다. 그런 면에서 살펴볼 만한 문적으로 거의 최초의 것은 <삼국사기> 지리지이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인 1145년경 김부식에 의해서 간행된 것이다.

여기에 기록에 따르면,

"임실군, 본래 백제의 군(郡)이었다. 경덕왕때 이름을 고쳤고, 지금 이름이 이로 인하였다. 영현이 둘이다. 마돌현은 경덕왕대 마령현으로 고쳤고, 거령현은 본래 거사물현이었던 것을 청웅현으로 고쳤고, 지금의 거령현이다."

위의 기록을 보고 사람들은 임실군이 백제때도 '임실군'이라 칭해졌을 것이라는 오해가 있는 듯하다. 백제라는 나라는 온조백제, 비류백제로 나뉘어지듯이 고구려의 유이민이 남하해서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사이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설이 많지만 우선 생각할 만한 것은 백제가 미추홀이나 위례성에 자리잡은 후 임실땅이 백제의 영역으로 들어갔을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은 정확하게 고증할 수 없다. 바로 그 이전 삼한시대에 이곳은 마한 땅이었을 것이고, 마한은 54개의 작은 분국형태로 있었다. 이렇게 연원을 따지고 올라가다보면 한이 없이 궁금해질테지만 유의미한 역사의 한 시점부터 끌어내려오자면 임실군 지역은 마한 54개국 중에 '신운신국(臣雲新國)'에 해당하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백제의 영역에 들어가서 이곳은 행정구역으로 '군(郡)'에 해당했을 것이지만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는 정확하게 뭐라 불렸는지는 기술하지 않았다. 조선초기의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임실조는 이런 의미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몇글자를 수록하여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임실은 본래 백제의 잉힐(仍?)이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을 같이 살펴본다면 이런 뜻이 된다. "임실군은 본래 백제의 잉힐군이었던 것이 경덕왕 16년(757)에 이름을 고쳐 '임실군'이라 하였고, 이 이름이 그대로 고려, 조선, 그리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 잉힐군이 어째서 임실로 고쳐졌나하고 의문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신라는 통치체제를 정비하면서 지명을 한자식으로 고쳤는데, 잉힐은 음성, 임실의 두 경우의 이름으로 고쳐졌다.

2. 임실군의 거사물현과 마돌현

임실(任實)을 달리 운수(雲水)라고 부른다. ‘임실’이라는 용어는 경덕왕 16년(757)에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꾸면서 백제시대의 잉힐(仍肹)을 음차하는 과정에서 임실이 되었다. 당시 임실군에는 마령현과 청웅현이 있었다. 잉힐이 임실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마돌현이 마령현이 되었고, 청웅현은 거사물현에서 청웅현이 되었다. 청웅은 신라시대 십정(十停)의 하나로 청웅이 설치된 것에 기인하였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후 전국을 9주로 나누었고, 각 주에 하나의 정(停)을 설치하였는데, 관할구역이 넓은 주에 2개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10정이 되었다. 음리화정(音里火停)ㆍ고량부리정ㆍ거사물정ㆍ삼량화정(參良火停)ㆍ소삼정(召參停)ㆍ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ㆍ남천정(南川停)ㆍ골내근정ㆍ벌력천정(伐力川停)ㆍ이화혜정(伊火兮停) 등이 그것이다. 당시 10정의 소재지는 모두 주둔군의 옷 색깔(녹, 황, 청, 흑)에 그 성격을 나타내는 효(驍), 무(武), 웅(雄) 등의 글자를 붙여 불렀는데, 거사물정이 있는 소재지를 청웅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청웅은 고려시대에는 구고(九臯)로 불렸다.

어느 때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거사물정의 중심지가 지금의 지사면 일대로 옮겨져 거사물현이 되었고, 이것이 고려시대 거령현으로 이름을 고쳐진 것으로 보인다.

3. '임실읍'은 언제부터?

그러면 임실군내 임실, 현재 임실읍은 언제 생겼을까하는 것이 의문이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임실군의 군호는 757년에 만들어진 이래 치소는 청웅 혹은 구고에 있다가 조선시대 현재의 임실읍으로 옮겼다. 그러니까 임실읍에 치소가 있지 않았을 때에도 임실군에 ‘임실’이라는 마을명칭이 있었겠는가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운수’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임실군의 치소가 청웅, 혹은 구고에 있을 때에는 임실이라는 고을의 이름이 ‘운수’마을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그러면 현재 임실을 둘러싸고 있는 용요산의 이름이 사요산에서 고쳐진 때가 임실이라는 이름으로 고치고 치소가 옮겨졌을 무렵이지 않을까하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아울러 임실현청이 기대고 있었던 작은 산은 봉황대가 되었다. 용요산과 운수봉아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니, 용요산과 봉황대는 곧 임실현의 치소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임실의 별호 ‘운수’는 바로 운수봉과 운수정에서 그 이름의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운수정은 임실현청의 남쪽 무고(武庫)가 있는 곳에 있었다는 우물인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고장에 신임 사또가 부임해 올 때마다, 이 샘물을 한 사발 원님에게 드리게 되면 원님이 마시고 물 맛을 칭찬하였으며, 이 물을 마신 원님은 그전에 아무리 성급하고 포악한 분이라 할지라도 성질이 온순해질 뿐 아니라,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게 되었다 한다.

운수에서 임실로 개명

운수에서 임실로 고쳐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태조 1년에 완산부로 승격되었던 전주는 태종 13년 10월에 다시 '전주부'로 개칭되었다. [<태종실록> 권26, 13년 10월 15일] 이는 경기 외의 여러 도명(道名)은 감사본영(監司本營)과 유영(留營)인 주(州)의 이름에 따른다는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것은 그대로 임실에도 적용되는 문제였다. 즉 임실군의 치소가 '운수'에서 군명을 따라 '임실'로 고쳐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현재의 임실읍의 옛이름은 운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