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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요정

  • 분류문화·체육
  • 주소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 490-3
  • 문의063-640-2313
  • 운영시간 : -
  • 휴무일 : -
  • 이용요금 : -
  • 주차시설 : -
  • 장애인시설 : -

소개

조선 중엽 선조때 최응숙(崔應淑) 선생이 임진왜란시 이곳에 낙향하여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건축자 최응숙은 임진왜란시에 공적으로 선조로부터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봉되었으며(『선조실록』, 선조 37년(1604) 6월 25일) 시호는 충현공(忠賢公), 호는 양요(兩樂), 건물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고 시문을 논하였고, 호를 따서 양요정(兩樂堂)이라 하였다. 12명의 진사를 배출하였다고 하며 많은 선비들이 시문을 숭상하게 되어 섬진강변에 양요정을 짓고 풍류객이 시문을 지어 이 정자에 남기고 간 시구가 14편이 남아있다. 1965년 섬진강댐을 축조하여 수몰로 인해 현재의 장소로 옮겨진 옥정호 상류에 위치한 양요정은 관촌, 신평면에서 흐르는 물과 운암면 쌍암, 사양리 쪽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옥정호의 만수시에는 섬이 되어 천혜의 풍치를 자아내고 있다.

양요정기[兩樂亭記]
내가 운수를 다스린 지 3년 되던 해 여름에 양용정(兩樂亭)에 올라가서 현판(懸板)의 운(韻)을 차운(次韻)하여 대략 호산(湖山)의 경치를 노래하였다. 어느 날 최봉조(崔鳳朝)군이 와서 말하기를, “이 정자는 우리 선조 진사공(進士公)께서 창건하셨는데, 지혜로운 자는 산(山)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물(水)를 좋아한다는 뜻을 취하여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300여 년 동안 세상이 병란(兵亂)을 겪고 집이 화재(火災)를 입어 편액의 기록이 실로 마멸되고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비록 평천장(平泉莊)의 화목(花木)은 감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는 못하겠지만, 하양(河陽)의 금근거(金根車)가 본래 교수(校讎)하는데서 전해짐이 없으니, 후손[雲仍]이 억울하게 생각한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바라건대 한 마디 말씀을 써 주셔서 선조의 자취를 추모하고 길이 후손에 남겨줄 자취를 삼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내가 이에 붓을 들고 머뭇거리면서 대답하기를 “무릇 천하의 정원과 누정은 전 시대 사람들이 그 이름을 짓게 된 연유(緣由)를 서술해 놓았다. 어떤 것은 문세(文勢)를 따라서 의미를 붙인 것이 있다. 난정기(蘭亭記)에서 회포를 펼친 것은 명이 길고 짧은 것은 조화에 따른다고 글을 맺었고,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슬퍼하고 기뻐한 것은 나아가고 물러나며 걱정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글을 맺은 것이 이것이다.
어떤 것은 경치를 묘사하여 정자 이름을 지은 것이 있다. 다경루(多景樓)는 백조(白鳥)와 청림(靑林) 때문이며, 서산사(西山寺)는 강(江)에 석양(夕陽)이 잠겨있어서 이름을 지은 것이 이것이다. 지금 이 누정의 뛰어난 경관은 (옛날에 비해) 언덕이나 계곡이 변하거나 바뀌어지지 않았으니 오히려 그 모습을 비슷하게 묘사할 수 있다.
편액에 붙인 뜻을 기록할 적에 (그 분의) 시(詩)를 읽거나 글을 송독하지 않으면 상론하여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 최씨(崔氏)의 가장(家藏)의 세보(世譜)에 이르기를 ‘진사공(進士公)께서는 집안에서는 순절(殉節)하신 조상의 뜻을 이어받았고, 나라에서는 임금의 호가(扈駕)에 참여한 공훈(功勳)이 있다.’고 하였다. 공과 같은 분은 능히 달도(達道)로 말미암아 달덕(達德)을 실천하셨으니, 인(仁)하시고도 지(知)하신 분이실 것이다. 그렇다면 공께서 즐기고 좋아하시는 것을 대략 상상해서 알 수 있다. 위로는 우리 임금이 천인(天仁, 천성적으로 어짊)하신 요(堯)임금이 되게 하시고 대지(大知, 크게 지혜로움)하신 순(舜)임금이 되게 하셔서, 단정하고 빛나며 팔짱을 낀 채 무위지치(無爲之治)로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을 것이다. 아래로는 이 나라 백성이 태평스럽고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음식을 배부르도록 먹는 지경에 이르게 하여 젊은 사람은 즐거워하고 늙은 사람은 기뻐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주현(州縣)의 학자(學者)는 다 준수(俊秀)하니 학문(學問)을 좋아하면서도 힘써 실천하고, 측은(惻隱)하게 여기는 마음과 시비를 가리는 마음의 단서를 확충하여 모든 일과 행위에 했을 때 펼치게 하였으리라. 천양지간(天壤之間)에 곤충(昆蟲)과 초목(草木)은 아주 미미한 생명이지만, 발로 해를 가리는 지(知)가 있고, (닭이) 먹을 것을 보면 함께 불러서 먹은 인(仁)한 마음이 있어서 그 삶을 이루어내지 않음이 없으니, 이를 일컬어서 인(仁)과 지(知)의 극치라고 할 만하며, 공께서도 마음으로 좋아하신 바이다. 그리하니 어찌 (물처럼) 두루 막힘이 없고 (산처럼) 후중(厚重)하여 옮기지 않음이 없는 것을 취하면서 일개 물이나 산의 기이한 경치만 좋아했겠는가.”라고 하였다. 봉조(鳳朝)가 일어나서 인사를 올리고 말하기를 “이 말씀은 넉넉히 우리 선조(先祖)에게서 듣지 못한 남긴 뜻이 될 만합니다.”하고 마침내 써서 벽에 걸었다.
진사공(進士公)의 최응숙(崔應淑), 자는 청지(淸之), 최봉조(崔鳳朝)는 공의 12대 사손(祀孫)이다.
정유(丁酉)년 5월 함양(咸陽) 박시순(朴始淳)은 기록한다.

 

[문화재]

· 지 정 :문화재 자료 - 문화재 자료

· 종 목 :제137호

· 지정일 :1997.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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