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군 제59회 임실 군민의 날 임실군 관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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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역사

  • 작성자 : 운영자
  • 작성일 : 2007.10.01
  • 조회수 : 3174

임실군 역사

1.선사시대-삼국시대

교통상으로 임실군은 전주와 남워,서쪽 호남평야의 만경강 동진강 유역과 동쪽의 섬진강 유역,나아가 남해안과 경남 서부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따라서 임실군은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근래까지 석기시대 유물이 찾아지지 않았다.그러다가 2006년 신평면 가덕리 하가마을에서 유문암제 돌날과 돌날몸돌,슴베찌르개,각추상석기,밀개등이 출토되었고, 그 중심연대가 후석기 시대로 확인되었다.또한 지사면 영천리에서 석영재 석기가 수습되고, 임실읍 감성리에서 유문암제 격지편이 발견되는 등 구석기시대 유물들이 찾아졌다.동년에 관촌,운암,삼계,오수,청웅등 여러곳에서 구석기 유물들이 채집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 또한 근년에 찾아졌다.1999년 운암면 운정리에서 신석기 시대 토기편과 파편들이 다수 수습되었고 2004년 같은 면 운종리에서 마제석부와 갈돌편,석기편등이 수습되었다.최근 조사에서는 오수면 용정리에서도 신석기 유물이 채집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서는 다수의 유적들이 임실군에 분포하고 있다.운암면 쌍암리,사양리,용운리,금기리,학암리등 섬진강 상류 운암천 유역에서 고인돌이 확인되었고, 덕치면 사곡리에서도 지석묘군이 찾아졌다.이들은 서해안인 부안,고창지역에서 동진강을 따라 내륙지방으로 전파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모두가 남방식이며 개석은 원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입체형의 자연석을 사용하고 있다.이들 외에도 다수의 고인돌이 확인되고 있고, 청동기시대 유물산포지 및 고분군등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선사시대 유적들은 임실군에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삼한시대 임실군은 마한에 속했지만, 54개 소국중 어디에 속했는지 분면치 않다.그만큼 임실군의 초기역사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임실군에 관한 기록은 백제시대부터 나타난다."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오늘날의 임실군은 삼국시대 때 백제 영토였으며, 당시 그곳에는 임실군,돌평현(突坪縣),거사물현(居斯勿縣)이 있었다.임실군은 오늘의 임실지구이고, 돌평현은 청웅지구에 해당하며, 거사물현은 오수지구에 있었는데 남원군 북부지역을 포함했던듯 하다.오늘의 임실이란 군명이 백제때부터 있었고, 또 그 때부터 "군(郡)"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2.통일신라-고려시대

백제 멸망후 임실군은 신라에 부속되었으며, 완산주의 관할하에 있었던 것으로 처정된다. 신라는 경덕왕 16년(757)에 전국의 지명을 한자로 바꾸고 주,군,현간의 영속(領屬) 체계를 강화하였다.이 조처로 완산주는 전주로 바뀌고, 1주(전주) 1소경(남원) 10군 31현을 거느리게 되었다.이때 임실군은 그대로 유지했으나, 거사물현은 청웅현(靑雄縣), 돌평현은 구고현(九皐縣)으로 개칭되어 각각 순화군(淳化郡,순창)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세고을이 다같이 전주에 예속되었다.

거사물현이 청웅현으로 바뀐 것은 그곳에 10정(停,幀)의 하나로서 군단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0정의 소재지는 주둔군의 옷 색깔(녹,황,청,흑)에 그 성격을 나타내는 효(驍),무(武),웅(雄) 등의 글자를 붙여 개칭하였다.거사물성은 원래 지금의 장수군 산서면과 남원군의 덕과면과 보절면 사이의 성산(城山,411M) 위에 있었고, 뒤에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로 옮겨진듯 하다.현재 성산에는 성터와 수십기의 고분군이 남아 있고 영천리의 '현 터'에는 경지정리전까지 많은 주춧돌등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경덕왕의 개혁은 20년만인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환원되어 백관의 호가 본래대로 복구되고 군현명이 원래의 이름으로 되돌아갔다.이때 임실 또한 임실군 돌평현 거사물현등의 이름으로 다시 환원되었다.

고려 건국후 다시 돌평현과 거사물현이 구고현(九皐縣),거령현(居寧縣)으로 개명되어 정착되었다. 성종 2년(983) 12목이 설치되고, 14년(995)에 10도제(道制)가 실시되면서 임실현,구고현,거령현은 모두 강남도(鱇南道)에 속하여 전주순의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의 관할하에 놓였다. 현종 9년(1018)에 개경,서경,12계수관도(界首官道)로 지방제도로 확립되었는데, 12계수관도는 4도호부(都護府) 8목(牧)의 체제였다. 이때 임실군 구고현 거령현은 모두 전주 계수관 관내인 남원부의 임내(任內)에 속하였다. 임내란 중앙에서 수령이 파견되지 않고 이웃 수령관의 수령에게 위임통치되던 곳으로, 결국 임실군 구고현 거령현 어느 곳도 수령이 파견되지 못하고 남원부의 속현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남원부 임내에 속하였던 임실군이 명종 2년(1172)에 감무관으로서 수령관으로 독립되어 중앙에서 수령이 파견되고, 남원부의 임내이던 취인부곡(醉人部曲)과 양등량지소(楊等良紙所)가 임실군 임내로 이속되었다.공민왕 3년(1354)에는 구고현 출신으로 원나라 사신이 되어 온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가 나라에 공을 세웠다고 하여 '구구현'이 '구고군'으로 승격되었다.그렇지만 구고군은 수령관으로 독립되지 못하고 거령현과 함께 여전히 남원부의 임내로 남았다.

 

3. 조선시대

후 여말에 실시된 행정도로서의 도제(道制)가 확립되었다. 고려시대 2~4개의 계수관도(界首官道) 또는 수령관도(守令官道)를 하나로 묶은 안찰사(按察使,按廉使) 제도가 운영되었는데, 안렴사는 5~6품의 낮은 관직으로 일도순찰의 성격을 띈 것이다.고려말 창왕 1년(1388)에 안렴사제가 도관찰출척사(道觀察黜陟士)로 바뀌어 대신(大臣)중에서 차임되었고, 공양왕 1년(1389)에는 경관(京官)을 겸하지 않은 전임(專任)의 관찰사가 파견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마침내 행정관서인 경력사(經歷司)(가 설치됨으로서 비로소 명실상부한 군현의 상부기관으로서 감영제(監營制)가 확립되었다.조선 건국후 골려 5도에 경기도(京畿道)와 양계(兩界)를 3도로 개편함으로서 8도제가 마련되었다.

조선건국후 "경국대전"에 의하면 전국은 2도[都: 한양(판윤,정2품), 개성(유수, 종2품)]와 8도 아래4부[府 : 평양,영흥,전주,경주(부윤, 종2품)], 4대도호부(大都護府 : 영변,안변, 강릉, 안동(대도호부사, 정3품)], 44도호부(都護府 : 도호부사, 종3품], 82군[郡 : 군수, 종4품], 34현령[縣令,종5품], 141현감[顯監, 종6품] 등 총 331관으로 구성되었다.

 임실군은 조선건국후 태조 3년(1394)에 구고군이 남원부 임내에서 임실군 임내로 이속되었고, 태종 9년(1409)에는 모든 임내가 직촌화됨에 따라, 임내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군현이었던 구고군,취인부곡,양등양소 등이 없어지고 4개 고을이 임실군 하나로 통합되었다. 거령현은 이 때 남원도호부의 직촌으로 병합되었다.

태종 13년에는 감무관이 현감관으로 개편됨에 따라 임실군도 감무에서 현감으로 바뀌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와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임실 고현(古縣)은 지금의 북쪽 30리,하북면 방동(지금 관촌면 방수리 방골)에 있었으며 현이 되면서 용요산(龍繞山) 밑으로 읍을 옮겼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임실군 때의 읍은 관촌에 있었는데 조선초 구고군이 임실군에 병합되고 곧이어 임실군이 현이 되면서 그 중간인 현제의 임실로 옮겨진 것이 아닌가 한다.

임실현은 조선초 전라도 4계수관(전주,남원,나주,장흥) 중 남원 계수관에 속했고, 세조 12년 이후 진관체제에서도 남원진관에 편제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전라도 5영중 남원 좌영이 아니라, 전주 중영에 임실현이 속하였다.

한편 지금의 임실군내에는 당시의 임실현에 오원역(烏院驛,관촌)과 갈담역(葛潭驛,강진면 갈담),남원도호부 관내에 오수역(獒樹驛)이 있었다. 오원역과 갈담역은 삼례역에 속하였고, 오수역은 찰방사(察訪司)가 있는 오수도의 수역(首驛)으로서 남원,곡성,구례,광양,순천 등의 11개 역을 관할하였다.

"호구총수"에 의하면 정조 13년(1789) 임실군의 호수는 6,408호, 인구는 27,516명(남 12,571, 여 14,945)이었다.당시 임실군은 18개 면(面)에 145개리(里)였다. 그 18개 면은 일도면(一道面), 이인면(里仁面), 상동면(上東面), 상북면(上北面), 구고면(九皐面), 창인평면(昌仁坪面), 하북면(下北面), 옥전면(玉田面), 덕치면(德峙面), 내량발리면(內良發里面),신안면(新安面), 남면(南面), 동면(東面), 감선면(甘城面), 신덕면(新德面), 강진면(江津面), 상운면(上雲面), 내촉리면(內촉里面) 등이다.

 

4. 근,현대

고종 32년(1895)부터 1914년에 이르기까지 대폭적인 지방제도의 개편이 단행되었다. 임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종 32년 모든 군현이 "군"으로 개편됨에 따라 임실현도 임실군이 되고, 동시에 23부제의 남원부에 속하였다.이듬해 1896년 13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전라도가 남북도로 나뉘면서 임실군은 전라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광무 10년(1906) 월경지(越境地)와 두입지(斗入地)가 정리되면서 남원군의 둔덕(屯德), 오지(梧枝), 말천(末川), 석현(石峴), 아산(阿山), 영계(靈溪)등 6개방이 두입지로서 편입되었다(24개면). 그러면서 영계면(현 순창군 동계면 동남부, 적성면 동부)은 남원부의 성남방(城南坊)과 순창군의 아동면(阿東面)에 가로막혀 새로운 월경지가 되었다.

1914년 월경지 영계면이 순창군으로 이속되고, 남원군의 지사면(只沙面)과 덕고면(德古面)의 일부 즉 오늘날 둔남면의 오수 읍내가 새로 편입되었다. 이와 동시에 영계면을 제외하고 오수와 지사면을 포함한 종전의 24면 350리가 12면 130리로 폐합되었다. 폐합된 12개 면을 보면 임실면(任實面), 청웅면(靑雄面), 운암면(雲巖面), 신평면(新坪面), 성수면(聖壽面), 둔남면(屯南面), 신덕면(新德面), 삼계면(三溪面), 오천면(烏川面), 강진면(江津面), 덕치면(德峙面) 등이다. 이후 1935년에 오천면이 관촌면(館村面)으로 개명되었다. 운암면은 1927년에 운암댐이 축조되어 300 여세대가 수몰되고, 1965년에는 '섬진강 다목적 댐'이 건설됨으로서 350여 세대가 수몰되었다.

1979년 전국의 모든 군청 소재지를 읍으로 하는 대통령령에 따라 임실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1992년에는 둔남면을 오수면으로 개칭하였다.그리하여 2006년 12월 현제 임실군은 1읍 11개면 131리(법정리)로 편제되어 있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실읍

청웅면

운암면

신평면

성수면

오수면

67.66㎢

34.77㎢

76.16㎢

33.70㎢

60.36㎢

40.49㎢

신덕면

삼계면

관촌면

강진면

덕치면

지사면

65.78㎢

54.08㎢

53.63㎢

50.61㎢

42.08㎢

17.79㎢

참고문헌:문화유적분포지도-임실군 편-(전주역사박물관,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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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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