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군 제59회 임실 군민의 날 임실군 오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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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면 연혁 및 명칭 유래

  • 작성자 : 담당자
  • 작성일 : 2007.05.18
  • 조회수 : 2839

○ 오수면 연혁 및 명칭 유래

행정구역

연혁 및 명칭 유래

獒樹面

○연    혁

  - 고려시대에 남원부 둔덕(屯德 )방이라 불림

  - 조선시대는 둔덕방과 남면으로 분리되어 있었음

   -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둔덕방과 남면을 통합하고 여기에 남원군 덕과면의 행정구역이었던 오수리와 대명리 일부를 편입하고       면의 이름을 둔덕방과 남면의 첫 자를 따서 둔남면(屯南面)이라 불림

  - 1992년 8월 10일 오수면(獒樹面)으로 행정구역 명칭변경이 바뀜

○명칭유래

  - 충심있는 개의 이야기로 유명한 곳으로서 이곳 지명을 따라 개오(獒는)자, 나무수(樹)자 오수면(獒樹面)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獒樹面

獒樹里

  - 주인은 살리고 자신은 죽었던 의견의 무덤을 만들고 지팡이를 꽂아 두었는데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큰 나무가 되어 그 명칭을 오수(獒樹)라고 이름 지었으며 남원군 덕과면의 행정구역이었던 오수리를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金岩里

  - 조선시대 초기 지금으로부터 약500여년 전 즉, 서기 1400 년경 김해김씨 김유말(金有末)이 벼슬을 잃고 이곳 시골로 이사하여 생활하여 오던중 조선시대말 전주이씨가 이주해 와서부터 차츰 마을의 터가 잡혀가기 시작하였다.

  김유말이 이곳에 와서 마을 앞에 있는 큰바위와 김씨만이 사는 마을이라 해서 금암(金岩)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龍井里

  - 龍井이라 부르게 된 동기는 우물에서 용이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5백여 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행정구역

연혁 및 명칭 유래

 獒樹面

新基里

  - 이 마을의 옛날 이름은 둔덕리 새터라고 불리워 오다가 구한말에 근방 7동네를 망라하여 행정구역상 둔덕방이라 했는데 이곳 신기마을은 그 중 3백여년전 이웃 동촌에서 이필형이라는 사람이 분가하여 터를 잡았다고 신기(새터)라 불리게 되었다.

屯德里

  - 중국의 여응종 장수가 동촌에 거주하고 있는 김복흥을 만나기 위하여 군사를 데리고와 지금의 둔기리에 진을 치고 김복흥과 면담하였다. 원래 김복흥은 덕인(德人)이라 둔덕(屯德) 두 글자를 살리기 위하여 그대로 부르게 되었다.

龍斗里

  - 북향촌(北向村)이며 지형이 W자형으로 되어 있어 충수설로는 운중발용(雲中發龍)격 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용(龍)

    이 등천할 때는 구름다리가 필요하다 하여 이곳 지형에 비추어 운교(雲橋) 일명 구름다리라고 부르게 되었고, 원래 둔덕방에 속하는 1개 마을로서 부근이 공마장으로 되어 있었다 하여 구장(球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운교와 구장마을을 합쳐 용두리라 한다.

屯基里

   - 옛날 진(陣)을 치고 싸움이 있어 군사가 주둔한 곳이라

     서 둔터라는 이름이 나왔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둔터를 둔기(屯基)라 부르고 있다.

大井里

   - 이 마을은 형성된 지 꽤 오래된 곳으로서 야자형(也字形)이라 하여 대야촌(大也村)으로 불러오다가 마을안에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큰 우물이 있음을 특징삼아 큰대(大)자 우물정(井)자 대정이라 부르게 됐다. 지금도 마을 한가운데에는 큰 우물이 존재하며 마을의 생활용수로 활용하고 있다.

 

행정구역

연혁 및 명칭 유래

 獒樹面

大明里

   -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군 덕과면에서 오수면으로 편입된 4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 한 묘지가 있었는데 약 300여 년 전에 어떤 도사가 지나면서 그 묘지가 남쪽을 향한 메부리형이 분명하다 하여 그 전설을 따서 남악(南岳)이라 이름지어진 남악마을, 약 300여 년 전에 어떤 오승이 묘지를 잡아주면서 이 마을의 터가 메추리 명당터라고 해서 메추라기라 불리어 오다 한일합방 이후 마을 이름을 오수리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상신촌(上新村)이라 부르는 상신마을, 마을 근처의 산림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임성동(林成洞)이라 부르는 임성마을, 약 5백여 년 전 어떤 오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의 뒷산 묘지가 국화혈(菊花穴)이라 하고 앞들을 국화들의 물형(物形)을 잡았다는 전설로 인하여 국평(菊坪)이라 마을이름을 부르는 국평마을 이렇게 4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梧山里

  - 약 3백여 년 전 문화유씨의 후손들이 이곳에 내려와 처음 거주하였는데 유씨의 유서 중에 이 지대의 형상이 양유광풍(楊柳光風)에 오동영월(梧桐迎月)격이라 하여 오동(梧桐)으로 이름지어 부르다가 약 2백여 년 전에 연안김씨 신제라는사람이 자리를 잡은 터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마을의 뒷산에 금저옥반(金箸玉盤)이라는 명당이 있다고 하여 금산동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일제시대에 지명을 마을 주변에 오목(梧木)이 있다고 하여 오산(梧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酒泉里

  - 이조 연산군때 선비 이수(李洙)가 무오사화(戊午士禍(1498년)를 피하여 이곳에 들어와 정착한 곳인데 이 마을앞 독산에 방석이 있고 그 복판이 확독같이 패어 감주와 같은 물이 항상 고여 있었으며 나그네들이 지나가다 목이 마를 때 이 물을 달게 마셨다 하여 주천(酒泉)이라 하였다 한다.

 

행정구역

연혁 및 명칭 유래

 獒樹面

鰲岩里

  - 전설에 의하면 약 5백여 년 전 어느 겨울에 여자 장수가 마을 뒷산에 가는 도중 찬(寒) 바위를 치마에 싸다가 큰 돌바위를 세웠다 하여 마을의 이름을 한암(寒岩)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3백여 년 전부터 옆 동네의 바위가 자라모양이라 하여 자라울이라 부르다가 일제시대에 풀이하여 오촌(鰲村)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한암과 오촌 두 마을을 합쳐 오암이라 칭하였다.

鳳泉里

  - 약 3백 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 뒤 산 이름이 봉황산이어서 그 이름을 따 그 밑에 있는 마을을 봉산(鳳山)이라고 부르다가 어떤 원님이 행차하다가 봉산 옆 우물에 도착하여 목이 말라 물을 마시게 되었는데 원님은 우물이 매우 차다며 그 물을 냉천수라고 말하였다는 연유로 그 뒤에 형성된 다른 마을의 이름을 냉천(冷泉)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봉산과 냉천의 앞 글자를 따 봉천(鳳泉)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君坪里

  - 지금으로부터 약 5백여 년 전 무학대사가 팔도강산을 유람하던 중 군평리의 한 마을인 지금의 군곡(君谷)마을 골짜기에 도착하자 산천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산의 용세가 좋고 산의 물형으로 보아 군신회조 명당이 있다고 예언하였다 하여 물형에 따라 이름을 군곡(君谷)이라고 이름지어 살다가 이후 산 밑으로 1~2호가 살다가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앞들이 넓고 연못이 있다하여 지형을 따라 들땡이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평당(坪塘)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1백여 년 전 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에서 약 50M 거리의 동남쪽에 있는 바위가 북(鐘)모양이라 하여 북바위라고 했고 또한 이름을 북샛터라 부르다가 일제시대에 종동(鍾洞)이라 부르게 되어 이 세 마을을 합쳐 군평(君坪)이라 부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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